Quote of the day
possibility of revolutionary class consciousness to historically emergent contradictions of the social totality… the historically adequate need crystalizing this subjectivity, which is often vaguely or nonconsciously experienced… neither the realization of an ascribed mission, nor the step-by-step defetishization of capitalist society, but rather a prepolitical and preconscious structure of needs which is historically formed, the self-reflected consciousness of which allows for a social consciousness which strikes at the root of the present social order: alienated labor.
Moishe Postone, Necessity, Labor, and Time: A Reinterpretation of the Marxian Critique of Capitalism
어제의 자신에게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오트밀을 먹고 라면과 국과 버터만두를 먹고 꿀캐슈와 땅콩을 먹고 피자한판을 먹고 맥주 두잔을 마셨다. 배가 불러서인지 술을 마셔서인지 일찍 잠에서 깼다.
꿈을 꿨다. 싸우는 꿈. 먹을거 접시에 받으려고 줄섰는데 어느놈이 앞에 끼어들었다.
그것도 동양인이었다. 스스로 동양인을 낮잡아 보아서 인가? 오리엔탈리즘.
체격은 비슷했다. 그리고 못생겼다. 그놈을 밀쳐냈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불알을 쥐어짰다. 가랑이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들어올려 패대기 쳤다. 눈을 찔렀다. 박치기했다. 어디서부터 꿈인지 상상인지.
꿈에 엄마도 나왔다.
프로이트 생애편을 들어서인지 엄마의 젊고 예쁜 모습이 책표지에 실렸다.
특정 개인들의 삶을 소설로 재화하는데 엄마가 제 5권이었다.
보통 꿈은 당일날 생각했던 것들을 반영한다.
프로이트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엄마가 꿈에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을 정신분석한 후 만든 이론이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그러나 그의 아빠는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20살여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형들이 오히려 엄마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항상 들어맞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틀렸다고 단정짓거나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치워버리면 뭘 배울 수 있나?
아만다와 얘기를 나누던 중 든 생각이다. 항상 나중에 재정리된 생각… 그리고 그때 이 말을 했더라면…
시간을 관통해 큰 영향을 남기고 여전히 현실에 개입하는 이들.
그 이론을 맞는지 틀리는지 정확성의 관점에서 따지기보다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려내고 그 관계성을 따져야 배울 수 있다. 그들의 어떤 조건에서 어떤 삶을 통해 그런 이론이 나왔나? 왜, 어떻게 그가 그런 생각과 선택을 했나? 왜, 어떻게 지금여기와 다르고 같은가? 그러면 왜, 어떻게 지금여기서 선택해야 하는가?
당대 부르주아 가족 구성과 사회적 관계는 현대 일반적인 것과 매우 다르다.
그런 특수한 환경과 조건에서 프로이트와 맑스같은 대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만들었다면 그게 과연 얼마나 현대에 직접 적용가능한가?
그러나 특수하지 않은 삶과 조건이 과연 있는가?
일반적인 것 안에 특수한게 있고 특수한 것 안에 일반적인 게 있다.
그들이 상류층이어서 뛰어난 이론이 나왔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결국 그들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 아닌가? 상류층이라는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 상류층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이 오히려 영리하지 않나?
그들의 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단정짓고 지나치는 태도 또한 시간을 그저 직선적으로, 일방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인식은 또한 자신의 현재만을 긍정하며 과거와 미래를 포기함으로써 결국 자신을 세계 내의 존재로부터 소외시키며 부정하게 되는 치명적인 인식이 아닌가?
고착되지 않기에 잡을 수 없지만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최초의 정신”.
과거, 현재, 미래가 직선이 아니라 서로 오가며 개입하는 관계라면, 결국 그들이 과거의 “최초의 정신”을 이해하려 나온 이론이 여전히 미래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데 개입한다면, 지금여기 또한 그 “최초의 정신”과 미래의 역사를 통해 그들과 엮이는 것이 아닌가?
풀뿌리 운동. 잡초의 끈질김에 감동을 받곤 한다. 그러나 그 잡초의 끈질김 자체가 목적이라면 잡초는 그저 보잘 것없는 것이 되고 말지 않나? 미래의 언젠가 이뤄질 잡초의 변신을 상상하지 않고서 잡초의 끈질김에서 감동이 이는가? 그렇다면 잡초는 어떻게 변신할 수 있나? 잡초가 나무가 될 수 있나? 꽃이 될 수 있나? 아니면 아직 규정되지 않은 그 무엇? 일단 최소한의 적절한 온도, 공기, 토양이 주어져야 하겠지만, 그저 잡초가 무성한 것에서 감동이 이는가? 잡초의 변신은 종자의 변화로 이루어질테다. 잡초는 무엇과 결합해 어떤 변화를 이루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