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공동체
Q17. J11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힘
Quote of the day
거대한 경제적 불균등은 말하자면 삶의 불균등이다.
전쟁은 찢겨진 세계에서의 전쟁이 되었다. 왜냐하면 세계는 존재하기를,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을 하기를 고통 가운데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통합화’라는 이름 아래 점점 더 깊어져가는 세계의 벌어진 틈 여기 저기에서, 바로 공동체는 분열되어 있으며 그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함께’하면서 상호간의 유희로 인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힘들만이, 서로 간격을 두고 있는 현전들만이 이쓸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자신을 진정 사실대로 직시하면서 우리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어떤 일이 있어도 길어내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마주한다는 것은 혼잡하고 맹목적인 혼란만을 가져올 뿐이다.
친절을 가장하면서 너무나 많이 낭송된 ‘이타주의적’도덕에 반대해, 이방인과의 준엄한 관계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방인의 기이함은 실존과 현전의 조건이다.
서양을 단죄하는 것도, 어떤 신비한 동양을 요구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 안에서 자신 때문에 균열에 의해 갈라진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 균열로부터 세계의 어렴풋이 떠오르는 의미가 오늘날 어떻든 간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어렴풋이 떠오르는 의미, 그 의미는 불분명해진 의미가 아니다. 어렴풋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의미의 구성 조건이다. 그러한 의미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거기에 우리의 궁핍함과 우리의 의무가 있다.
마주한 공동체, 장-뤽 낭시, 105-110쪽
Journey and Journal
Q16. 실패를 경험하기 위한 결합의 시도
Quote of the day
“여기 그 방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지만 자연으로 열려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며칠 밤으로 추정되는 무한정한 시간 동안 각각의 밤은 모두 끝없는 밤이며 두 인간 존재들은 오직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 (어떤 점에서는 찬양하기 위해) 결합되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실패는 그들의 완벽한 결합이 가져온 진실이며, 또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항상 이루어지는 이 결합에서의 착각을 드러낸다…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어떤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근접성은 모든 종류의 공허의 내밀성을 거쳐 나온 것이다. 그에 따라 그들은 근접해 있지만 ‘융합과 연합을 위한’ 공모에서 비롯되는 희극을 연출하지 않는다… 이 무를 위한 사랑의 시도 자체. 그들을 자신들도 모르게 고무시키며 서로 헛되이 접촉하도록 유도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 이외에 결국 어떠한 다른 목적도 갖지 않는 시도. 기쁨도 증오도 아닌, 고독의 향락, 고독의 눈물, 준엄한 자신 너머로 향하게 하는 압력. 그리고 결국 단 하나의 최고 주권, 죽음이라는 최고 주권. 죽음, 떠도는 죽음, 부를 수는 있지만 나눌 수는 없는 죽음, 우리로 하여금 죽지 못하게 만드는 죽음. 어떠한 힘도 갖고 있지 못하고 어떠한 효력을 가져오지도 못하며 어떠한 과제도 남기지 않는 죽음. 그러나 그 죽음은 하찮은 것을 내어준다. 그 하찮은 것 가운데 그 죽음은 네가 ‘연결되어 있기를 받아들이는 결국 단 하나의 삶, 즉 표현 불가능한 삶’의 매혹을 간직하고 있다. 황혼에서 여명까지 한때, 이 공간에서 두 인간 존재는 타자에게 자신을 완전하고 전체적이고 절대적으로 노출시키는 것 이외에 다른 존재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모리스 블랑쇼, 79-80쪽